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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 우리 영영 만나지 말아요

이 글은 텀블벅 프로젝트 '보통의 서사'를 통해 비매품 도서로 출판될 나의 책 원고의 일부이다.

(라고 쓰고, 그 마감일이 오늘까지인 덕분에 지금 매우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함께 남긴다...)


 하루는 회사 사람들과 노래방엘 갔다가 민서의 <좋아>라는 곡을 부르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다 너무 좋다는 거예요. 노래 너무 잘 한다고, 이 노래가 나랑 너무 잘 어울린다고. 발성이 좋고 고음이 곧잘 올라간다는, 다분히 노래를 하는 기교에 대한 칭찬인 걸 알면서도 왜 나는 다른 노랠 다 제치고 하필 이 노래를 잘 부른 걸까 싶어 조금 민망했답니다. 그저 목소리에 전해졌을 뿐인 칭찬에 민망했던 건, 이 노래의 가사가 담은 ‘찌질함’이 꼭 나 같아서, 이런 내 찌질함이 혹시 다른 사람들에게 들킨 게 아닐까 괜히 걱정되었기 때문일 거예요.

 

 아시겠지만 이 곡은 윤종신이 부른 <좋니>의 여자 버전이잖아요. 남자가 헤어진 여자를 그리워하면서도 더는 붙잡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찌질함을 담은 노래가 <좋니>라면, <좋아>는 약간 달라요. 이 노래의 화자는, 자기만 힘든 것 같아 억울해하고 있을 게 뻔한 전 남자친구에게 ‘억울한가봐, 너만 힘든 것 같니. 어쩜 넌 그대로니?’라고 한탄하길 일삼거든요. 하지만, 자기가 ‘몰래 흘린 눈물’도 알아주길 바란다는 점에서 제가 보기엔 찌질하기로 도긴개긴인 것도 같습니다. – 음, 아닐 수도 있겠어요. 혹시나 해서 <좋니> 가사를 다시 훑어보고 왔는데 맙소사, 이 남자는 스스로를 ‘뒤끝 있는’ 예전 남자친구로 칭할 만큼, 그러니까 스스로의 찌질함을 목청 높여 부르짖을 수 있을 정도로 찌질함으론 한 수 위인 것도 같습니다. – 하지만 <좋니>의 전 남자친구와 <좋아>의 전 여자친구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전 여자친구, 그러니까 저는, 전 남자친구, 그러니까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인해 이제 너무도 행복하다는 점일 겁니다.

 

 당신과 함께였던 때의 나는 참 어렸습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사랑은 서툴렀고 마음도 급했습니다. 당신이 나의 첫사랑인 건 앞으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사실이 맞지만, 오직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당신이 내 마지막 사랑일 줄로만 알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해맑지만 가여운 생각일 뿐입니다. 처음일 수록 소중할 수록 더욱 가열차게 찢기고 세차게 깨져버리며 끝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한 게 아니라, 그저 처음으로 나에게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 찾아왔으니, 당신이 어떤 사람이고 내가 어떤 사람이건, 당신과 나의 사랑은 무조건 영원할 줄로만 알았던 거예요.

 

 해맑지만 서투른 사랑, 그리고 급한 마음에 비해 나는 너무 어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그때의 생각과는 달리- 나의 어리고 미성숙한 마음이 한 몫 하였습니다. 보내지 않을 편지이니 하는 말이지만, 만일 그때의 당신이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당신은 이제서야 진정으로 나에게 반할 지도 모릅니다. 나는 꽤나 어른스러운 어른이 되어가고 있거든요. - 최소한, 어른스러운 척이라도 하는 어른이 되는 데에는 성공한 어른이 되었거든요. – 전과 달리, 이제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의지하면서도 그에게 내 삶을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 법을 알아가고 있어요. 오히려 이제 나는 내 소중한 사람이 지쳤을 때를 대비해 그가 기대어 쉴 수 있는 휴식처를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여유도 챙겨가며 살고 있어요. 내 마음을 스스로 보듬고 챙기는 법을 배워가는 건 기본이고요. 물론 사람이 쉬이 변할 수는 없겠죠,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요. 하지만, 이젠 선을 잘 지키는 어른이 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소중한 사람에게 기대 쉬는 영역과 소중한 사람을 기대어 쉬게끔 하는 영역을 가르는 선,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 모두 가능하도록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 하나가 되어 서로를 끔찍이 아끼면서도, 바로 그렇게 서로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반드시 지켜져야만 할 선을요.

 

 당신을 만날 때 나는 어쩜 그리도 오답투성이였을까요. 그런 오답투성이가 조금은 나은 어른이 될 수 있도록 해준, 그러니까 그때의 절절한 마음앓이와 가슴 아픈 시행착오로 나를 조금은 더 자라게 해준 당신에게 나는 영영 고마울 거예요. 이제 오직 그 고마움으로만 나는 당신을 기억하려 합니다.

 

 당신이 전해준 조각이 나에게 닿아 나를 자라게 해준 것처럼, 당신에게 전해진 나의 옛 조각은 당신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자라 어떤 모습이 되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당신의 물리학과 나의 철학이 궁극에서 하나로 만난다는 사실을 토론하며 가슴 뛰던 두 학부생은 이제 더는 만나지 않겠지만, 물리학과 철학의 최전선이 우주라는 광활한 터에서 정말로 하나로 수렴한다는 것이 점점 더 확실시되는 지금, – 이론적으로는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적어도 그걸 내가 정말로 이해하게 된 것은 최근이거든요 – 당신도 당신이 공부하는 물리학의 끝자락에서 가끔은 당신만큼이나 허황된 공상을 일삼던 철학도 한 명을 떠올리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아는 지인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다행인 것 같아요. 이렇게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나, 몇 년 전 그 날처럼 갑작스럽게 당신을 마주치는 날이 또 생긴다면, 마냥 의연할 수만은 없을 것 같거든요. 물론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십여년 전의 당신과 그때의 당신을 좋아하던 나이지 지금의 당신과 내가 아니니, 이제 우리는 아무런 의미 없는 사이예요. 맞아요, 당신은 과거를 지나 오늘을 사는 사람이기에 이제 내가 그리워하는 사람이 영영 될 수 없을 텐데도, 그럼에도 만일 내가 오늘 당신을 다시 만난다면, 나는 오늘 당신의 모습에서 그때의 조각 하나라도 찾고자 당신의 여기저기를 눈에 담다 그때의 조각을 찾지 못해 울어버릴 것이 분명합니다. 장담은 못하겠지만 당신 역시 나를 만난다 해도 내 모습에서 당신의 예전을 찾아낼 수 없어 끝끝내 슬퍼질 수 있겠죠. 그러니 우리는 지금처럼, 평생 더는 만나지 말아요.

 

 전할 수 없는 편지를 써야만 한다면 그 수신인은 오로지 당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당신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지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이젠 명확합니다.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은, 영영 전하지 못할 것이기에 더욱 소중한, 고마움이었어요. 우리의 과거는 힘겨운 것이었을 망정 그 과거를 함께한 사람이 되어주어서, 그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게 해주어서, 그리하여 지금 내 소중한 사람과 행복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당신을 향한 마지막 바람이 있다면, 과거의 나 역시 오늘 당신의 행복에 일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좋겠어요.

 

 행복하세요. 우리 서로 모르게, 각자 행복하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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